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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승부조작 '배신의 그라운드'

랑주아톰 2011. 6. 17.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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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승부조작 '배신의 그라운드'

K리그 구단 절반은 재정 어려워 선수들 최저 연봉 1200만원…

폭력 조직이 선수출신 브로커 통해 연봉 낮은 선수에 접근

승부조작 대가로 2천만~3천만원 제의

5만원권 박스로 전달… 비싼 외제차 사고 돈 자랑하다가 꼬리 밟힌 선수들도

브로커들이 되레 조심하라고 당부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혹시 들어봤어?"

 

지난해 여름 친한 축구계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프로축구에 승부조작하는 애들이 있다는데"라고 했다. 그때가 승부조작 관련 소문이 처음 퍼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설마'했다.

 

비슷한 소문이 올해 3월 다시 불거졌다. "○○○이 조직 폭력배로부터 협박을 당한다더라" "A팀은 베스트 11의 30%가 승부조직에 가담하고 있다"는 식의 얘기였다. 소문이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선수들 사이에 특정 팀과 관련자들의 이름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증거는 여전히 없었다.

 

지난 5월 6일, 인천의 24세 젊은 골키퍼 윤기원이 사망하면서 일부 언론에서 승부조작 관련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취재를 진행하면서 승부조작이 터져도 크게 터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한국 K리그는 정상적인 프로 스포츠 판으로 보기 어려웠다. 지난달 25일 창원지검이 프로축구 선수 2명과 브로커 1명을 구속하고, 달아난 브로커 1명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물밑에서만 맴돌던 프로축구 승부조작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왜 프로축구가 타깃이 됐을까

 

프로축구 K리그 입성은 모든 축구 선수들의 꿈이다. 그러나 선수들의 생활은 겉보기만큼 화려하지 않다. 한국 프로축구 16개 구단 중 7개 시·도민구단은 1년 예산이 대기업 구단의 절반인 80억~10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 이런 구단에서 주전이 되지 못하는 선수의 최저 연봉(하한선)은 1200만원이다. 주전급이라고 해도 5000만원 안팎인 선수가 허다하다. 더구나 선수 생명은 길어야 10년 정도고, 부상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생계를 접어야 한다.

 

많은 전문가는 "프로축구가 외형을 키우는 데 집중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구단이 많아졌고 '가난한 선수들'이 양산됐다. 이것이 불법 승부조작 브로커를 불러들이는 조건이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검찰 수사와 함께 취재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승부조작의 수법들이 속속 드러났다. 승부조작은 주로 폭력 조직과 연결된 사설 불법 베팅 사이트를 통해 이뤄진다. 지역에 뿌리박은 폭력 조직이 축구선수 출신 브로커를 통해 연봉이 낮은 선수들에게 보통 2000만~3000만원의 사례금을 대가로 승부조작을 제안한다. 성공적으로 승부를 조작해 내면 두둑한 보너스를 얹어 주기도 한다. 한 번만 성공해도 연봉 이상의 돈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시·도민구단의 저연봉 선수들이 불행의 덫에 빠지게 된 것이다.

 

철저한 점조직 형태인 불법 폭력 조직의 1차 포섭 대상은 골키퍼였다. 승부조작에 가장 유리한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 골키퍼 조련을 담당하는 김현태 골키퍼 코치는 "이제는 실수를 해도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분위기가 됐다"면서 골키퍼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했다. 골키퍼 다음은 수비수다. 승패에 영향을 미치기 가장 쉬운 포지션이다. 때로 공격수가 포섭되는 것은 구체적인 스코어 조작을 위해서다. 승부조작에 나서는 공격수는 교묘한 헛발질에 상당한 연기력도 필요하다.

 

◆외제차 샀다가 덜미 잡힌 선수들

 

승부조작 소문을 취재하면서, 선수들이 얼마나 죄의식 없이 범죄적 행위에 간여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승부조작 가담자들은 갑작스레 비싼 외제차를 구입하거나 심지어 동료들에게 "쉽게 큰돈을 만졌다"고 자랑삼아 떠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것이 입소문으로 선수들 사이에 번졌고, 나중에 구단들이 승부조작 선수들의 '블랙 리스트'를 작성할 때 이런 증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 프로축구 구단 관계자는 "요즘은 브로커들이 승부조작 참가 선수들에게 절대 돈자랑 하지 말고, 외제차 사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전했다.

 

브로커들은 사전 사례비와 사후 보너스를 빳빳한 5만원권 현금으로 상자에 담아서 가담 선수들에게 전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선수와 연락할 때도 명의도용 '대포폰'을 쓰기 때문에 증거를 잡기도 어렵다.

 

폭력 조직은 프로축구 선수 출신을 브로커로 포섭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 이번 검찰의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지난 30일 서울 P호텔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 전북 현대 선수 출신 정종관(30)씨도 브로커로 활동하다가 수사망이 좁혀오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에 앞서 검찰에 구속된 브로커 김모(28)씨도 프로축구 K리그 출신이었다.

 

◆메가톤급 이름들이 줄줄이

 

승부조작에 가난한 무명 선수들만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는 증언도 속속 나왔다. 국가대표급을 포함한 유명선수들의 이름도 거론됐다. 그 중엔 올림픽 대표와 국가대표를 지낸 상무소속 김동현(상주 상무)도 포함돼 있었다.

 

김동현을 능가하는 이름들도 구체적인 정황과 함께 계속 거론됐다. 국가대표를 지낸 A선수에 대해선 '승부조작을 하다가 적발돼 동료들 앞에서 무릎 꿇고 다신 안 하겠다고 빌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 다른 유명선수에 대해선 '조폭의 꾐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적극적으로 가담시켜 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들 외에도 직간접적으로 승부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거론된 선수들을 모두 모으면 거의 국가대표팀에 버금가는 팀을 꾸릴 수 있을 정도라는 끔찍한 소문도 있다.

 

그러나 경기 내용만 보고 승부조작을 적발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전문가들도 고개를 흔든다. 조광래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22명의 선수가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축구경기의 특성상 전문가도 선수의 속임수를 쉽게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조작 상황을 제대로 보려면 의심스러운 선수의 동작을 비디오로 반복 관찰해야 할 겁니다. 이를테면 우리 팀 진영에서 상대방이 코너킥을 하는데 우리 수비수가 상대편 골문 쪽으로 뛰어나가면 그건 틀림없이 이상한 거예요. 한두 번 이런 행동을 해도 처음엔 눈에 보이지 않지요."

 

동료의 '이상 행동'을 감독보다 먼저 알아채는 사람은 같이 뛰는 선수들이다. 지방 A구단의 경우 선수들이 먼저 나서서 구단 측에 동료의 '수상한 움직임'을 제보했고, 이에 따라 구단이 자체조사를 벌여 방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 어디까지 해낼까

 

프로축구계에서는 "이번에 승부조작을 뿌리 뽑지 않으면 한국 축구는 망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에 어물쩍 넘겼다간 승부조작 암세포가 다시 덩치를 키우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용수 세종대교수(KBS해설위원)는 "두 번째 승부조작이 나올 때는 정말 대책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이 처음이니까 팬들도 충격을 받고 개선을 요구하겠지요. 만약 두 번째로 같은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관심도 두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서운 거예요. 그때가 되면 '프로축구는 으레 승부조작을 하는 종목'으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팬들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고요."

 

이번 사건이 한국 사회의 깊은 도덕 불감증, 패거리의식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차범근 전 수원삼성 감독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킹 서비스인 C로그에 "승부조작은 큰일 날 일이고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면서 "더 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이런 일들이 비교적 용납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라고 썼다. 그의 말대로 많은 선수들이 "이 정도야 큰 문제 없겠지"라는 생각으로 사설 도박 베팅에 발을 들여 놓는다. 선수는 프로연맹 규정에 따라 어떤 형태의 경기 관련 도박에도 참가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 있지만 유혹을 막지는 못한다. 베팅 사이트 접속은 '안 해본 선수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만연해 있다.

 

검찰의 강력한 수사 의지 없이 승부조작을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방 구단의 무명 선수 몇명을 잡고 마무리를 지을 것인지, 의심스러운 구단 전체로 수사를 확대해 가담자를 낱낱이 밝힐 것인지에 따라 한국 프로축구의 미래와 정화(淨化) 여부가 달렸다는 의견이 많다.